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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역사17

13편 : 호족 출신 태조 왕건 패서 지역의 호족, 왕이 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 말부터 귀족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일어나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이 약해졌습니다. 또,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전국에 도적의 무리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방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뭉쳐 방비하며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지방에서 성장한 세력을 호족이라고 하며, 경주에서 내려온 지방 귀족이나 촌주, 군인, 상인, 농민, 도적 등 출신이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궁예와 견훤, 왕건 등도 호족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예성강 주변(패서 지역)이 가문의 근거지였습니다.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 궁예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왕건은 궁예가 직접.. 2023. 3. 19.
12편 : 후삼국시대의 문을 열고 닫은 견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된 견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습니다. 견훤은 뒤에 자신의 이름에서 딴 견 씨로 성을 바꾸었습니다. 견훤은 자랄수록 남달리 체모가 뛰어났으며,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습니다. 892년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2000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 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900년에 완산주(完山.. 2023. 3. 16.
11편 : 관심법 궁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미륵불을 꿈꾸었던 궁예 궁예는 출생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는 설,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궁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이 죽이라고 명하였는데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가 떨어지는 그를 받다가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 눈이 멀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10여 세에 세달사(世達寺: 고려시대 興敎寺)에서 출가하였고, 스스로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하였습니다. 891년 세달사를 떠나 죽주(竹州:지금의 안성시 이죽면)의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892년에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였습니다. 894년 10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입성하여 .. 2023. 3. 16.
10편 : 철의 나라, 가야 가야라는 말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나(駕那)설로 끝이 뾰족한 관책(冠幘)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고, 두 번째는 평야설로 남방 잠어주5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에서 왔다는 설이고, 세 번째는 간나라설로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이라는 설이고, 네 번째는 갓나라설로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갓나라[邊國]로 불렸다는 설이고, 다섯 번째는 가람설로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ᄀᆞᄅᆞᆷ[江] 또는 가ᄅᆞ=갈래[分岐]의 뜻이라는 설이고, 여섯 번째는 겨레설로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입니다. 그 근원은 알타이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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