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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역사17

5편 :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여 부여사의 기원 초대 단군왕검은 비서갑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네 아들을 두었는데 부루(夫婁). 부소(夫蘇). 부우(夫于). 부여(夫余)입니다. 막내아들인 부여를 지금의 하얼삔에서 서남방으로 300리 떨어진 곳의 제후로 임명합니다. 이 아들 부여의 이름에서 나중에 부여란 국호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여사의 기원이 됩니다. 대부여의 등장 : 역사상 첫 부여 대부여는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부여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47세 단군 중에서 고조선(진조선) 말 44세 구물단군 때 '조선'이란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부여는 47세 고열가 단군 때 멸망하게 됩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것은 송화강 아사달 (1048년)과 백악산 아사달(860년)시대를 합한 것입.. 2023. 3. 8.
4-5편 : 고조선의 영토와 멸망 그리고 한사군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의 영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출토되는 유물의 유사성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고조선의 강역을 가늠해볼 수 있는 유물로는 북방식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북방식 탁자형 고인물 등 3가지 유물의 출토 여부로 고조선의 강역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략 요동에서부터 한반도 중북부를 아우르고 있는데 3가지 유물들이 출토된 범위를 고조선의 영토라고 규정할 순 없습니다. 같은 문화권일 뿐 고조선의 영토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조선의 영토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기에 현재로서는 완전하게 고조선의 영토를 알 순 없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는 고조선의 전성기 때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가 패수라는 강이었다고 하는데 이 패수의 정체를 두고 설이 분분합니다. 중국 랴오닝성의 다링강이었다는 .. 2023. 3. 7.
4-4편 : 위만 조선과 고조선의 사회상 위만 조선 진나라 말기 진시황이 폭정을 일으키고 진승·오광의 난 같은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진시황 사후에 항우와 유방이 궐기하던 진한교체기같이 중국 본토에 많은 사건·사고들이 잦다보니 수많은 중국인이 고조선으로 망명해왔습니다. 준왕은 이 난민들을 모두 받아줬습니다. 중국 역사서 위략에는 옛 연, 제, 조 지역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연나라에서 온 위만의 집단도 있었습니다. 준왕은 위만에게 관직도 주고 서쪽 변방 지역을 분봉해주었습니다. 아마 많은 난민을 받아주며 고조선의 국력이 더 커지고 중국은 대혼란의 시대이니 주나라처럼 부족제에 기반한 봉건제도를 시도해보려 한 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지.. 2023. 3. 7.
4-3편 : 고조선의 발전과 기자조선 고조선의 발전 중국 기록인 관자에 고조선이 최초로 등장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특산물로는 문피(표범가죽)이 있었고, 관자의 배경인 제나라로부터 8천리가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중국의 기록인 전국책에는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나라나 연나라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로 이 때의 사서들로 보아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은 중국의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고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은 요동 지방이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말기를 기록한 중국 역사서에는 조선과 연은 패수라는 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조선은 연나라와 대등하게 대립할 정도로 국력이 커졌었는데 그 ..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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