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을 꿈꾸었던 궁예
궁예는 출생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는 설,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궁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이 죽이라고 명하였는데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가 떨어지는 그를 받다가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 눈이 멀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10여 세에 세달사(世達寺: 고려시대 興敎寺)에서 출가하였고, 스스로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하였습니다.
891년 세달사를 떠나 죽주(竹州:지금의 안성시 이죽면)의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892년에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였습니다.
894년 10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이들을 14대(隊)로 편성하고, 금대(金大)·검모(黔毛)·흔장(昕長)·귀평(貴平)·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함)으로 삼았습니다.
궁예는 사졸들의 신망을 얻어 곧 장군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고 부대 편제를 정비하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는 등 명주에서 자립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895년 8월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 군현을 차지하는 등 군세를 떨쳤습니다.
이에 패서(浿西:예성강 이서 황해도) 지역의 호족 중 귀부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896년에는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유력한 호족 왕건 가문이 귀부하였습니다.
패강진 호족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는 898년 7월에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천도를 통해 왕건 가문과 연결된 패서 호족을 비롯한 호족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였을 것입니다.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는데, 팔관회 개최는 구복(求福)과 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899년 7월에 북원을 중심으로 남한강 일대에 큰 세력을 이루었던 양길의 군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이를 계기로 900년 10월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통일신라의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되었던 명주·삭주·한주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901년에는 고려(高麗)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때의 고려는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흔히 후고구려라고 부릅니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던 것이나 당(唐)에 군대를 요청해 고구려를 멸망케 한 신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던 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900년 견훤(甄萱)이 백제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백제를 건국하였음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후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세가 태조 즉위전기(卽位前記)에 의하면, 903년 3월 왕건에게 수군을 지휘하게 하여 후백제의 금성(錦城)을 공취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습니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습니다.
광평성을 설치하고, 병부(兵部)를 비롯하여 여러 관부를 두었는데 신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광(正匡)을 비롯한 관등도 마련하였습니다. 이로써 중앙정치조직이 정비되었습니다.
광평성은 서열 제1위의 행정관부이면서 한편으로는 화백(和白)의 전통을 이은 기구로써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던 관부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당시 궁예 정권이 호족연합 정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905년 7월 궁예는 철원으로 다시 천도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바꾸었습니다.
904년 공주의 장군 홍기(弘奇)가 투항했습니다. 공주는 이후 후백제와 후삼국 쟁패의 요지가 되었습니다.
905년 8월에 죽령의 동북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906년 상주 사화진(沙火鎭:지금의 상주)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905년에는 패서 13진을 분정(分定)하였습니다. 패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자 그 외곽의 대동강 유역의 호족들도 귀부하였습니다.
909년 왕건을 후백제 방면으로 다시 보내 수군으로 진도, 고이도 등을 점령하였으며, 912년 나주를 공격한 후 백제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나주 일대를 둘러싼 후백제와의 공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백제를 배후에서 위협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2/3를 차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한편 대외적으로 오월(吳越)이나 후량(後粱)과 국교를 맺는 데에는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동아시아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던 반면 발해와는 소원하였습니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큰아들을 신광(神光) 보살, 막내아들을 청광(靑光) 보살이라고 하여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신격화하였습니다.
복장이나 행차에 있어 나름대로 미륵불의 장엄을 꾸미기도 하였습니다. 불교 경전 20여 권을 지었고, 강설하기도 하였는데, 경전에는 자신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가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로 바꾸었습니다.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그는 미복으로 도망쳐 산곡 간에 숨어 있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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